서도호, 공간을 따라가면 사람이 보인다
한국을 떠난 뒤에야, 서도호는 ‘집’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타국의 낯선 환경에서 살아가며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공간과 기억의 문제로 풀어온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설치미술가 서도호.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되었던 그의 작업이 2026년 8월 27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한자리에 선보인다. 초기작부터 주요작, 현재 진행 프로젝트까지 폭넓게 만나볼 기회이다.

목차
- 25년 전 베니스의 기억
- 수많은 사람 사이, 그리고 한 사람의 집
- 떠난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 ‘집’
- 작품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작품 안으로
- 전시 관람 포인트 3가지
- ✅ 전시 관람 정보
25년 전 베니스의 기억
25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처음 서도호의 《Floor》(1997–2000)를 마주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넓게 펼쳐진 유리 바닥 아래, 수만 개의 작은 인물상이 두 팔을 들어 유리판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위를 걷는 순간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던 ‘바닥 아래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당시 《Floor》의 설치 모습은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당시 전시 모습 보기 | Universes in Universe
곧이어 만난 《Some/One》(2001). 개인의 신원을 증명하는 약 10만 개의 군번 인식표들을 빼곡히 엮어 만든 작품으로, 멀리서 보면 장군의 갑옷을 연상시킬 만큼 단단하고 위압적인 형상을 하고 있었다.
두 작품은 수많은 익명의 개인이 모였을 때 만들어지는 거대한 힘과 그 안에서 개인의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고 사라지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때도 지금도 수년 동안 서도호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사라지기 쉬운 ‘개별적 존재’의 무게를 추적해왔다. 이 화두는 또다른 주요 관심사인 ‘이주와 거주’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 사이, 그리고 한 사람의 집
서도호의 작업 반경을 넓게 따라가 보면, 서로 다른 방향처럼 보이는 두 가지 관심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하나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다.
《Floor》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작은 군상들과 《Some/One》의 10만 개의 군번줄. 개별적으로 보면 작고 익명적인 존재들이지만, 결집하는 순간 거대한 구조체가 된다.
다른 하나는 ‘개인과 공간의 결속’이다.
서도호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집과 거주 공간은 작업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그는 1994~1995년 미국 유학 당시 자신이 살던 공간을 측정하고 천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999년에는 어린 시절 살았던 성북동 한옥을 재현한 《서울 집/L.A. 집》을 선보였다.
작가에게 ‘집’은 단순히 건축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기억과 이동의 경험이 쌓여 있는 공간이다.
서울에서는 익숙한 한옥의 형태가 다른 문화권의 미술관으로 옮겨져 낯선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그 순간, 집의 문화적 정체성과 작가 개인의 기억이 한 화면 안에서겹쳐진다.
떠난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 ‘집’
서도호는 1991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에 살 때는 집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이주의 경험이 자신에게 ‘home’이라는 개념을 자각하게 만든 계기였다고 말했다.
(“I didn't really think about a home when I was living in Korea. It was only when I left that the concept of 'home' developed.” - 가디언(The Guardian))

서도호는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면서 자문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집 연작은 이러한 질문을 공간의 형태로 풀어낸 작업이라 볼 수 있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이동하면서 사라질 수 있는 개인적인 기억과 정체성을 공간이라는 형태로 다시 붙잡아 두고자 시도했다.
‘떠나온 집을 다른 곳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실제 한옥을 통째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도호는 집의 크기와 구조를 정밀하게 측량하고, 그것을 얇고 반투명한 천으로 다시 짓는다.
이렇게 완성한 집은 한편으로 낯설기도 하다.
실제 공간을 재현했으나 실재하는 건축물이 아니다.
집의 벽과 문, 창문은 분명 눈앞에 있으나 벽돌이나 콘크리트처럼 단단하지 않다. 구조물의 형상을 한 색색깔 천 사이로 빛이 투과해 반대편 공간이 어렴풋이 비치고, 조도의 변화에 따라 윤곽은 흐려진다.
반투명한 천은 기억의 희미한 성질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접어서 이동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재료이기도 하다.
서도호는 ‘집’을 두고 떠나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궤적을 따라 휴대하는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작품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작품 안으로
서도호의 설치작업은 작품을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작품 위에 올라서고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Floor》가 좋은 예다. 수많은 작은 사람들이 투명한 판을 떠받치는 모습을 사진으로 바라보는 것과, 실제 그 판 위에 올라서서 발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전혀 다르다. 작품의 크기와 자신의 몸이 그 구조물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발밑의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실제 공간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집 연작도 마찬가지다. 사진이나 평면 이미지로 기억 속 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재현된 집 안을 걸으며 문과 창, 벽과 방을 살펴볼 수 있다. 문을 지나고 창을 바라보는 경험은 특별한 미술관의 언어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본 생활의 동작이다.
그래서 서도호의 집은 특정한 한 사람의 기억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각자의 집과 거주 경험을 떠올릴 여지를 남긴다.
서도호의 작품에서 관람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작품의 크기와 공간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작품과 자신의 관계를 만들어간다.
전시 관람 포인트 3가지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서도호의 예술적 궤적을 총망라한다. 깊이있는 감상을 위한 세 가지 시선을 아래와 같이 추천한다.
- 작은 것부터 살펴보기: 수많은 작은 인물과 반복되는 요소가 모여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드는 방식 살피기.
- 몸으로 경험하기: 실제 크기로 구현된 공간 안에서 천의 질감과 봉제, 문과 창, 세부적인 구조와 빛이 만들어내는 느낌을 살펴보기.
- 작품 사이의 관계 보기: 개인과 집단, 이주와 거주,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관심사가 작품마다 어떻게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지 비교해 보기.
개인과 집단, 이주와 거주, 기억과 정체성은 서도호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서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다.
한 채의 집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다시 사람의 기억이 쌓여가는 과정을 보기 위해 전시장으로 향하는 건 어떨까.
✅ 전시 관람 정보
전시명 ㅣ 서도호
기간 ㅣ 2026.08.27~2027.2.9
장소 ㅣ 국립현대미술관 서울(MMCA Seoul)
시간 ㅣ 월화목금일 10:00~18:00,
수토 10:00~21:00
휴관일 ㅣ 1월1일, 설날, 추석,
임시 휴관 ㅣ 6월 9월 12월 첫째 주 화요일
관람료 ㅣ 추후 공개
교통편 ㅣ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오시는길
'전시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더현대 서울 뱅크시 전시 후기 l BANKSY: STILL HERE, 뱅크시는 어디에 있는가. (0) | 2026.09.01 |
|---|---|
| 부산 추천 전시 ㅣ 워너 브롱크호스트(Werner Bronkhorst), 미니어처 인물화 (0) | 2026.08.06 |
| 서울 추천 전시 I 더현대 서울 뱅크시(Banksy): Still Here 관람 가이드, 왜 지금도 뱅크시인가 (0) | 2026.07.22 |
|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전시 후기 ㅣ 한국 작가들이 다시 쓴 큐비즘 (0) | 2026.06.26 |
|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개관 전시 후기ㅣ ‘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 현장 관람을 추천하는 이유 (0) | 2026.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