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여전히 '뱅크시의 게임'에 동참하는가
목차
-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
- 도시 박물관을 기습한 뱅크시
- 시각의 폭력
- 거장의 캔버스를 훔친 유희
- 할머니들이 건네는 묵직한 위로
-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뱅크시
- 뱅크시를 다시 보게 된 이유
- 전시정보
1. 프롤로그 :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 그리고 세상의 공모
환한 햇살이 스며드는 화려한 백화점.
자본주의의 면모를 과시하는 장소 안에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뱅크시의 작품전이 열리는 '반전의 현장'을 다녀왔다.

전시장 입구 벽에는 수많은 기사와 뱅크시의 상징 중 하나인 쥐 한마리 이미지가 있었고, 곧이어 원숭이 여왕, 타블로이드 신문이 무질서하게 붙은 벽과 작품 영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뱅크시의 정체에 대한 화제성과 그가 던지는 주요 메시지의 면면을 전시장 초입에서 한눈에 보여주려는 듯했다.
뱅크시의 정체가 확실히 밝혀졌던가?
전시장 도입부 곳곳에 펼쳐져 있는 그의 정체에 대한 신문 보도 기사를 나도 모르게 지나쳤다. 사실 이곳에 온 목적은 그의 정체가 궁금해서라기 보다 그의 메시지를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과 탐사 보도가 그의 본명 가능성(로빈 거닝햄 등)을 거론하고, 법의 수사망이 언급되는 국면에서도 세상은 대개 그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흔적을 익명의 안개 속에 남겨두며 일종의 암묵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얼굴을 가린 채 전 세계를 상대로 펼쳐지는 비밀스런 그의 행보는 단순한 신비주의 마케팅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거리에서 시작된 작업을 미술관과 경매장, 언론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익명성 자체를 작품을 둘러싼 하나의 장치처럼 활용해 왔기 때문이다.
물리적 제약 속에서 급히 자리를 뜨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던 생존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장 강력한 시각 언어를 구사하는 동시대 아티스트 중 하나로 각인시켰다.
그래서 전시장을 들어서며 다시 질문하게 됐다.
이 얼굴 없는 작가의 작업에 대중과 미술계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주목해왔는가.
이번 《BANKSY: STILL HERE》 전시는 그 질문을 직접 확인해 볼 기회였다.
2. 도시 박물관을 기습한 뱅크시
뱅크시의 작업은 허가받지 않은 장소에서 이뤄지는 게릴라형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초기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 등의 벽면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설치, 전시했던 초기 행보는 제도권 미술과 권위를 향한 유쾌한 조롱이자 도전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과거 담벼락을 전전하던 익명의 아티스트는 어느새 브리스톨 박물관에서의 《Banksy vs Bristol Museum》(2009년) 전시회를 거쳐, 2023년 글래스고의 Gallery of Modern Art에서 《Cut & Run》 와 같은 대규모 공식 전시를 선보이는 작가가 되었다.

급기야 더현대서울 《BANKSY : Still Here》처럼 머나먼 아시아의 대형 상업 문화공간에서도 그의 작품과 이미지, 자료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전 세계 미술 시장이 주목하는 거대한 '체급'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익명성은 여전히 작품을 둘러싼 호기심과 관심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 하다.
철저한 제도권 밖의 반체제 아티스트가 어떻게 세계적인 미술관과 상업 공간에서 러브콜을 받는 거물이 되었을까. 자본과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돌을 던지던 작가가 이제는 그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다.
어쩌면 바로 이 모순 때문에 뱅크시의 행보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3. 시각의 폭력 : 과녁판의 여왕과 바코드 창살을 뚫고 나온 표범
뱅크시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가장 먼저 압도되는 것은, 설명서 없이도 직관적으로 들어오는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오래 바라본 작품이 두 점 있었다.

먼저, <원숭이 여왕(Monkey Queen)>은 '왕실 수저'를 물고 태어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을 원숭이로 바꿔놓은 작품이다. 왕관과 보석으로 치장한 원숭이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보다 출생에 의해 주어진 권위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을 발행한 Pictures on Walls(POW)는 작품을 소개하며, 영국 사회의 높은 지위가 재능이나 노력보다 ‘태어날 때의 우연(Accident of birth)’으로 주어진다는 취지의 설명을 덧붙였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권위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왕관과 보석 같은 상징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국가와 왕실의 권위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상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유니언잭의 색상과 사격용 과녁판을 배경으로 겹쳐놓은 구성은 국가와 왕실의 권위 역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뱅크시 특유의 시각적 농담처럼 다가왔다.

두 번째 작품은 <바코드(Barcode)>이다. 바코드의 수직선은 상품의 정보를 읽어내는 장치이지만, 여기서는 야생동물을 가두는 철창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자연마저 상품의 코드 안에 가두려는 소비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바코드의 창살을 탈출하여 걸어나오는 표범의 강렬한 이미지에서 시스템을 향한 해방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4. 워홀의 캔버스를 훔친 가벼운 유희 : 테스코 스프와 케이트 모스
하지만 뱅크시의 모든 작업이 무거운 사회 비판과 혁명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내 대중적인 대형 마트의 PB 상품인 테스코 토마토 수프 캔이나, 2000년대 영국 패션계의 아이콘 케이트 모스를 워홀의 실크스크린 구도에 고스란히 얹어놓은 작업들. 두 작품은 심오한 혁명적 서사보다 팝아트의 거장을 향해 씩 웃으며 던지는 뱅크시 특유의 유쾌한 농담에 가까워 보인다.
"영국에서 흔하디흔한 테스코 수프도, 영국의 슈퍼모델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 한번 볼래?"
사실 뱅크시가 즐겨 쓰는 스텐실 작업은 워홀의 실크스크린 기법의 시각적 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워홀이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상품과 스타를 당대 미술의 아이콘으로 끌어올렸다면 뱅크시는 그 시각적 언어를 빌려 자신의 시대에 익숙한 테스코 수프와 케이트 모스를 등장시켰다.
워홀이 대중문화를 미술의 중심부로 끌어들였다면, 뱅크시는 거리의 문화를 미술관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접점이다.
치열한 생존의 길거리에서 출발한 뱅크시가 세련된 미술 시장의 아이콘마저 자신의 장난감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비틀어버리는 뻔뻔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5. 세월의 시계 앞에서 : 할머니들이 건네는 묵직한 위로
그렇다고 그의 유희가 가벼움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전시장 한켠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작품 <Grannies>는 그 유희의 이면에 숨겨진 깊은 서사를 슬며시 꺼내어 보인다.

백발의 인자한 할머니 두 분이 나란히 앉아 뜨개질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엮어내는 티셔츠의 문구는 “Punk's Not Dead (펑크는 죽지 않았다)”와 “Thug for Life (인생을 건 악당)”이다. 두 문구는 각각 펑크와 힙합의 반항적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 작품이 ‘저항은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슬쩍 뒤집어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젊은 시절 거리에서 반항을 즐겼던 사람들이 세월을 지나온 모습을 상상해본다. 더 이상 몸소 부딪히는 방식으로 저항할 수 없을지라도, 자신이 중요시 했던 태도와 취향, 반항의 기질을 가장 느리고 온화한 손끝으로 묵묵히 엮어낸다.
격렬한 저항의 메시지와 부드러운 수공예의 아이러니. 이 작품은 급진적인 투쟁의 은퇴를 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세월 속에서 저항과 소신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을 조용히 보여준다.
반항은 정말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모습만 바꾼 채 계속되는 것일까.
한편, 이 작품은 다른 방식으로도 읽힌다.
일부 미술시장 자료에서는 한때 저항적이었던 펑크와 힙합의 언어가 할머니들의 뜨개질이라는 편안한 일상 속으로 들어온 장면을, 반문화가 주류문화에 흡수되고 길들여지는 과정에 대한 풍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읽든, 격렬한 저항의 언어와 평온한 뜨개질이라는 예상 밖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만큼은 분명하다.
6.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뱅크시와 아트 상품

전시장 벽면 곳곳에는 뱅크시가 직접 스프레이를 뿌린 듯한 그래피티 이미지가 연출되어 있었고, 실제 작품이 등장했던 현장의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각 작품이 어떤 장소와 상황에서 등장했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럼에도 실제 거리의 시간성과 장소성을 완전히 대신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거리에서 시작된 뱅크시의 작업이 제도권 공간 안에서 다시 소비되는 모습을 마주하며, 그의 작업과 미술시장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시를 둘러본 뒤 아트숍에서 발견한 뜻밖의 <소더비 경매 컷아웃 퍼포먼스 포스트잇>.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직후 액자 속 작품이 일부 파쇄된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 사건은 뱅크시의 퍼포먼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사례다. 예술 작품을 파괴하는 행위 자체가 다시 시장의 관심과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이제 전시장의 아트상품이 되어 있다니.
이 포스트잇을 보며 웃었던 것은 단순히 기발한 굿즈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매장의 권위와 자본을 조롱했던 사건이 몇 년 뒤 전시장의 상품으로 다시 소비되는 모습까지도, 어쩌면 뱅크시가 만들어낸 ‘게임’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7. 프리뷰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다 : 뱅크시를 다시 보게 된 이유
프리뷰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뱅크시를 ‘관심을 끌기 위한 영리한 반항’으로 보는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전시를 본 지금도 그의 모든 행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을 직접 마주하면서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뱅크시는 단순히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미지와 장소, 사건과 미술 제도, 그리고 관람객의 반응까지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맥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작업을 단순히 ‘치기 어린 반항’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익명성과 미술시장 사이의 모순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모순 자체가 뱅크시를 바라보게 만드는 질문이 되었다.
결국 프리뷰에서 던졌던 질문도 조금 달라졌다.
뱅크시가 이 게임에서 이기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왜 기꺼이 그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가.
이번 전시는 그 질문에 완성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뱅크시를 바라보는 기준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전시장을 나서면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뱅크시의 게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리고 과연 우리는 그 게임이 끝나기를 원하는가.
8. 전시 정보
전시명: 《BANKSY: Still Here》
기간: 2026.07.22–11.3
장소: 더현대 서울 6층 ALT.1
관람료: 성인 23,000원
※ 전시의 전체적인 기획과 관람 포인트는 앞서 작성한 프리뷰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 뱅크시 전시 시리즈
① 프리뷰 바로가기 >> 뱅크시, 거리의 벽에서 시작된 예술 게임
② 리뷰 (현재글) >> 우리는 왜 여전히 뱅크시의 게임에 동참하는가
서울 추천 전시 I 더현대 서울 뱅크시(Banksy): Still Here 관람 가이드, 왜 지금도 뱅크시인가
뱅크시, 거리의 벽에서 시작된 예술 게임“BANKSY: Still Here”는 이번 전시의 제목이다. 뱅크시가 어디로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그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걸까? 그가 지적해 온 사회의 문
artstrollno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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