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보러 갔다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보게 되었다
보통 미술관에서는 한 작가의 세계를 따라가지만, 아트페어에서는 작품과 작품 사이를 걷는다.
한 작품을 보고 돌아서면 전혀 다른 작가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전 본 작품의 색과 형태가 다음 작품을 보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닮은 작품을 만나면 오히려 서로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2026년 9월, 코엑스에서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2026)과 키아프 서울(KIAF Seoul 2026)이 나란히 열렸다. 두 아트페어를 모두 둘러봤지만, 이 글에서는 프리즈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 아트페어 정보 한눈에 보기
Frieze Seoul 2026
2026. 9. 2(수) ~ 9. 5(토), COEX 3층
KIAF Seoul 2026
2026. 9. 2(수) ~ 9. 6(일), COEX 1층
목차 (펼치고 접기)
Prologue: 프리즈 서울, 작품과 작품 사이를 걷다
2026년 프리즈 서울에는 30개 국가 및 지역에서 130여 개 갤러리가 참여했고, 나흘 동안 7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입구의 쉼터 의자 주변부터 빼곡한 인파를 실감하며 ‘정말 거대한 아트페어에 왔구나’를 직감했다.
일정상 단 하루 동안 모든 것을 소화해야 했기에, 밀려드는 입장객을 피해 입구의 C홀을 지나쳐 D홀부터 관람을 시작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렇게 작품 사이를 바삐 걷다 보니, 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상 경험이 열렸다.

1. 데이미언 허스트의 가상 난파선: 미키마우스에게 세월을 입히다
페어 맵을 손에 들고 D홀로 무작정 걸어들어가 눈길을 사로잡힌 곳은 확연히 밝은 조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 부스였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의 솔로 전시가 펼쳐진 이곳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나비 연작, ‘신성한’ 알약 거울장, ‘절정의 색채를 뿜어내는’ 꽃 연작, 그리고 특히 내 시선을 잡아 끈 가상의 난파선 유물 시리즈 등이 선보였다.

허스트는 2017년 베네치아에서 《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을 통해 가상의 고대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유물이라는 거대한 허구적 서사를 전시한 바 있다.

이번 프리즈에서는 산호와 따개비로 뒤덮인 디즈니 캐릭터 조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키와 미니가 함께 있는 조각은 마치 오랜 시간 바닷속에 잠겨 있던 유물처럼 보였고,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된 데이지 대리석 조각 역시 해저에서 발견된 유물처럼 몸에 따개비가 붙어있는데, 마치 오래된 유물과 그에 얽힌 스토리를 현대의 조각상으로 탄생시킨 것처럼 보였다. 마치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가 성서 속 인물 다비드를 흰색 대리석 조각상으로 빚은 것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에 물리적 ‘세월’을 입히는 기발한 상상력. 조각상 받침대 바닥면마저 돌멩이와 따개비로 수평이 맞지 않게 처리한 디테일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유쾌하게 뒤트는 허스트다운 장치처럼 느껴졌다.
2. 지중해의 온기: 살보가 건네는 따뜻한 풍경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여운이 남은 작가는 마졸레니(Mazzoleni) 갤러리가 선보인 살보(Salvo, 1947–2015)였다. 초기 개념미술에서 1970년대부터 회화로 돌아선 이탈리아 작가로, 실제와 상상을 조합한 풍경, 도시, 여행과 기억을 연결하는 회화를 지속적으로 그렸다.

살보의 풍경화는 낯선 이국적 풍경에 묘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지중해의 태양빛이 스며든 화면은 눈 덮인 겨울 풍경조차 포근하고 아련했다.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살보가 실제로 경험한 풍경과 기억을 바탕으로 상상의 풍경을 그렸다면, 혹시 그가 기억하고 있던 ‘빛’을 화면마다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장소인데도 이상하게 같은 햇빛 아래 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이번에 처음 만난 작가였기에, 2015년 작고한 작가라는 사실은 그의 따뜻한 풍경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3. 변주의 기술: 익숙한 것을 낯설게
각각 다른 부스에서 만난 작가들은 국적도 나이도 스타일도 전혀 달랐지만, 한데 엮어볼 수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윤협, 조지 콘도, 그리고 바젤리츠는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나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기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재구성해 보여주었다.

탕 컨템포러리 아트(Tang Contemporary Art)에서 만난 윤협(1982~)의 작품은 점과 선의 즉흥연주 같았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오색 빛 점들이 모여 화려한 서울의 야경과 도시의 리듬을 시각화했다.

알민 레쉬(Almin Rech) 부스에서는 조지 콘도(George Condo, 1957~)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풍이 강하게 느껴졌고, 아류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콘도는 피카소를 비롯한 미술사 속 거장들의 형식과 언어를 가져와 인간의 내면적 신경증과 기괴한 심리를 비틀어 표현하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피카소와 다름을 가늠해보았다.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에서 마주한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1938~2026)의 거대한 거꾸로 된 인물화 앞에서는 나 역시 선입견을 내려놓게 되었다. 전통적이고 익숙한 구도를 거부하며 대상을 거꾸로 그린 작가. 익숙하지 않은 구도 그대로 낯선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세밀한 묘사 대신 거침없는 드로잉 선과 인물의 애절한 표정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4. 한 작품이 다음 작품을 불러내는 순간: 우국원, 콘도, 그리고 뒤샹
아트페어의 진정한 묘미는 조금 전 본 작품이 다음 작품을 보는 렌즈가 되는 순간이다. 키아프의 313 아트 프로젝트(313 Art Project)에서 만난 우국원(1976~)의 작품이 그랬다.

화면 전체를 채운 벚꽃과 일본의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형식, 그 아래 실눈을 뜬 시그니처 인물들. 작품 위에는 ‘All people are like grass…’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고, 오른쪽 위, 세로형 라벨에는 ‘伯多祿前書一章’, 즉 ‘베드로 전서 1장’이라는 표기가 들어가 있다. 사람의 영광은 들의 꽃처럼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내용이다. 일본풍 풍경화와 성경 문장,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조합한 점이 흥미로웠다.
이때 머릿속에서는 프리즈의 알민 레쉬에서 본 조지 콘도, 그리고 타데우스 로팍에 걸려 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모나리자 패러디 작품 《L.H.O.O.Q.》(1919)가 자연스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뒤샹은 익숙한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더해 기존 예술 작품의 권위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었고, 콘도는 잘 알려진 미술사적 회화 언어를 자신의 인물과 색채로 변형한다. 우국원 역시 익숙한 동양적 이미지와 우키요에의 형식을 가져오되, 그 안에 서양의 성경 메시지와 자신의 캐릭터를 겹쳐 놓는다.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의 작품들이 아트페어라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5. 가까이 다가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리만머핀(Lehmann Maupin) 부스에서 만난 서도호의 작품 앞에는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서도호는 타국 생활을 하면서 집과 공간, 이동과 기억에 대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반투명한 천을 엮어 만든 입체 작업과 더불어 실을 이용한 ‘thread drawing’도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매체 가운데 하나다.

멀리서 보면 정교한 색연필 드로잉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것이 ‘실로 그린 그림(Thread Drawing)’임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색실이 교차하고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생생한 결은, 작가가 품어온 기억과 공간의 파편들을 여기저기서 끌어와 엮어내는 듯 보였다.
반면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부스에서 마주한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1961~)의 《untitled 2026 (bangkok post, may 3, 2026)》은 다른 의미로 내 시선을 붙잡았다.

실제 신문 기사 위에 은박과 금박을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입히되, 가장자리를 살짝 들뜨게 해 틈새로 뉴스의 흔적을 드러낸다. 특히 들뜬 표면이 팔랑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끈다. 현실의 복잡한 정치·사회적 사건들이 자본주의의 화려한 금빛 포장지 아래 가려진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Epilogue: 가격표 없는 마켓, 작품과 작품 사이의 발견
아트페어는 결국 거대한 마켓 플레이스다.
일부 갤러리는 작품 옆에 가격을 표시했으나, 상당수 작품은 가격을 확인하려면 갤러리스트에게 직접 문의해야 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수많은 부스를 둘러보는 관람객에게 작품의 가격 정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작품을 실제로 보고 구매를 고민할 수 있는 시장의 현장인데도, 정작 작품의 가격은 한눈에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작품의 가격이 조금 더 공개되어 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장 구매하지 않더라도 여러 작가의 작품을 보고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미술시장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품을 사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먼저 가격을 알아보는 것부터가 하나의 장벽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매년 아트페어 전시장, 코엑스로 향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갤러리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작품을 선별하고, 이곳에는 세계적 거장과 동시대 작가가 일정한 미술사적 순서 없이 뒤섞여 놓인다.
따라서 미술관이 만들어둔 단단한 맥락 속을 걷는 대신, 아트페어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직접 작품과 작품 사이의 연결선을 엮어내게 된다.
“이 작품을 보니 저 작품이 생각난다”는 연상 속에서, 서로 다른 작품을 비교하고 대조해볼 수 있다.
무엇을 닮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는가.
그 차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곳.
그 복잡하면서도 찬란한 발견이 바로 우리가 매년 아트페어로 향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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